독수리 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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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독수리유격대편 - 김익수(220215-xxxxxxx)
· 작성자 독수리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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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유격대편

(본 증언록은 국방부 조사대와 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가 독수리유격대의 참전사실과 공훈을 조사 발굴하는 과정에서 당국에 출석하거나 또는 조사관과 편찬위원들이  기념사업회를 방문하여 생존대원들로 부터 증언을 채록한 것이며. 특히 전사편찬위원들과 34명 생존대원들이 대담형식으로 증언이 이루어 졌다. 여러 대원의 증언을 대표적이고 모둠 발언한 몇 명의 대원이름으로 정리한 것이다. 증언 일시: 1990년 3월 14일 포천 만세교 금주산가든에서)

성   명 : 김   익   수 (220215-xxxxxxx)
주   소 :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549
직   위 : 독수리유격대 제이대 대장, 독수리유격대 기념 사업회 회장


창설 과정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경기도 포천에는 여러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을 조직해서 주로 대공 활동을 하면서 경찰서와 군인 부대에 소속을 두고 정보 계통의 일을 하였습니다.

국방부였는지 육군본부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앙의 직할 정보 부대가 포천에 파견되어 있었고 7사단 정보과(9연대)와 포천 경찰서에서도 서북청년단을 내세워서 3.8이북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나도 이 부대와 임무를 받아서 3.8선을 넘어 다녔습니다. 그 당시 포천 경찰서장이 이해진이였고 중앙에서 파견됐던 정보 부대는 최각균 대위가 책임자였으며 9연대 정보과 파견대장은 김00상사였습니다.

최종성 대장과 나는 정보부대나 포천경찰서에 드나들면서 안면이 있었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최종성씨가 서북청년단 지역단장을 하면서 포천전기회사 사택에 살고 있었고 나하고는 별도로 대원을 모아서 정보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서로 비밀을 지키던 때었고 6.25가 터지자 나는 대구로 피난을 갔습니다.

대구에서 서북청년단을 조직한 김성주씨가 옛날의 서북청년단을 다시 모집한다고 하기에 나도 지원했습니다. 남산 국민학교에서 1주일정도 훈련을 시키고 영천 쪽으로 강을 건너가서 가다구찌 공장 이라는 곳에서 다시 훈련을 받다가 6사단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계급장은 이등병을 달아 주었는데 완전한 정식 군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나는 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였고 진격을 해서 초산까지 올라갔다가 포위가 돼서 우리 부대 전체가 완전히 녹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져서 초산을 빠져 나와 서울까지 내려왔고 9.28수복이 되자 포천으로 와서 최종성씨를 만난 것입니다. 옛날에 안면도 있고 서로 어떤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하니까 최종성씨가 먼저 유격대를 하자고 합디다.

9.28수복이 됐다가 다시 밀리는 중이니까 그때는 서로 먼저 피난을 갈려고 야단들이고 또 국민방위군을 모집 할 때었거든요. 또 방위군에 가면서 자기가 먹을 쌀을 한 말씩 지고들 갔어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유격대에 들어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6.25 전에 내가 정보활동 하던 것을 최종성 대장님이 잘 아니까 소대장을 시키더군요. 내가 데리고 간 유격대원 중에 서너 명이 전사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내가 데려다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독수리유격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사람들이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청해서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보병 제17연대 1대대 배속 당시

나는 소대장을 하였지만 어떻게 해서 32연대로 갔다가 17연대로 다시 오게 되었는지 그 속사정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은 3대대장 김영필 대위 한데 있다고 생각했고 17연대에서 쫓겨날 때도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장님과 간부들이 총살당하고 대원들은 옷을 뺏기고 쫓겨났는데 입고 있던 군복은 모두 뺏기고 어떤 대원은 양말까지 뺏겨 맨발에 팬티만 입었던 대원도 있고, 어떤 이는 내복 바람에 쫓겨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군복 속에 민간 내복을 껴입었던 사람은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음력설날(구정)인데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그런 때에 옷을 벗기고 적진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지요.

1대대에 배속되어 있어도 우리 유격대는 현역과 똑같은 보급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식으로 영장을 받아서 군대에 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군대에 자원한 것이니까 전쟁하는 것이 무섭다거나 싫다고 도망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대대에서 필요 없다고 내 쫓았을 때도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싸웠으니까요.

간부들이 어떤 경우를 택했더라도 도망은 아닙니다.
또 도망을 갔다고 하더라도 다섯 명이 책임을 졌다면 우리 대원들은 쫓아내지 말아야지요. 쫓아내더라도 옷은 벗기지 말았어야지요.
17연대에서는 절대적으로 잘못한 겁니다.

17연대에서 우리를 적진으로 쫓아낸 것은 빨갱이들에게 잡혀 죽든가 빨갱이가 되어 가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강둑에 모여 앉아서 의논을 했는데 그때 내가 이렇게 얘길 했습니다.

“여기서 각자 흩어져서 개인행동을 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대장님께서도 돌아가시면서 당부한 얘기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는 흩어지지 말고 뭉쳐야 하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체 행동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된 모든 책임은 김영필(32연대 3대대장)에게 있다.
그러니 김영필 대위를 찾아가면 그 사람은 우리를 지원해 줄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다른 대원들도 찬성을 하여 단체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대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뭉쳐서 잘 싸우고 흩어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풍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17연대로 올적에 부대가 제천으로 이동을 한다고 들었으니까 32연대를 찾아서 제천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17연대에서 쫓겨나면서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17연대 놈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강을 타고 쭉 내려오다가 배를 타고 남쪽(아군 지역)으로 건너와서 32연대로 향했습니다.

옷은 빈집(민가)에 들어가서 바지저고리 짚신 등 되는 데로 주워 입었습니다. 신분증도 없고 복장도 엉망이니까 패잔공비로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단양에선가 철도 경찰에게 신분 확인이 안돼 곤욕을 치르고 나서 나중에 그들의 협조를 받아 열차를 타고 32연대 3대대로 갔습니다.

32연대 정문에 가서 김영필 대대장과 전화를 하니까 첫마디가 “어떻게 됐느냐? 누구누구 죽었느냐?”고 묻습디다. 서로 마음이 격해지니까 얘기도 못 하겠더군요.
김영필 대대장이 차를 보내 줘서 3대대와 합류 했지요.

보병 제 32연대 3대대 및 연대 수색 중대 배속 당시

날짜와 시간 장소 같은 것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32연대로 간 후에도 김영필 대대장이 우리 유격대를 잘 도와주었고, 연대 정보주임으로 발령이 나니까 우리 유격대를 연대 수색중대로 배속을 시켰으니까 대우를 잘해 준 폭입니다.
우리 유격대가 대우를 잘 받았기는 하였지만 고생도 그만큼 많이 했고 역할도 많이 했습니다.

풍기역에 도착해서 대대장 한데 전화를 거니까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요. “ 누구누구 돌아가시고 우리들끼리 이렇게 와 있다 ”고 하니까 사실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됐으니까 자기도 말도 못하고 나도 울음이 터지고 서로 말을 못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의복 등 우선 다른 것이 급하니까 내가 차를 보내 줄 테니 빨리 본부로 오라는 것이지요. 나도 자세한 것은 들어가서 말하겠다고 하고 조금 있으니까 차를 보내줘서 타고 갔는데 무슨 광산사택이어요.

우리가 도착 하니까 현역들이 잠을 자다 말고 배낭과 군장을 들고 내려오면서 “젠장! 뭣 들이 오는데 이렇게 야단들이야?”며 투덜대면서 내려갑디다.

자다가 우리가 오니까 쫓겨나는 거지요.
현역들이 군복을 두벌씩 가지고 있었는데 옷도 한 벌씩 반납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 유격대가 옷이 없으니까 현역한테 뺏어서 우리를 입힌 겁니다.
거기서 며칠을 푹 쉬니까 총이고 군장이고 모두 준비를 해주고 나서 5-6명씩 각 지서로 파견을 나갔어요. 내가 파견을 나간 곳이 월암산(?) 같기도 한데 여하튼 충주 가까운 곳이었어요.

이렇게 충주 가까운 곳에 왔을 적에 유격대 간부들이 처형된 목행리에 가 봐야 갰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누군지 우리 대원 한 사람을 데리고 갔어요.
동네에 가서 군인들 다섯 명이 죽은 곳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이 알더군요.

그 당시에는 군인들의 말이라면 잘 듣던 때여서 동내 주민들을 몇 명 데리고 가서는 아무렇게나 묻혀있는 다섯 분을 대장님부터 계급 순서대로 다시 묻었습니다.

그 때가 봄이 아니었는데도 파리가 보였던 생각이 납니다. 다시 잘 묻어 드리고는 이분들이 우리 대장들인데 이분의 성씨가 최씨니까 이 다음에 자손들이 찾아오더라도 알아 볼 수 있게 표시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주민들이 “최씨라면 혹시 우리 최씨 일지도 모르니 잘 돌봐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32연대로 와서는 파견을 다니기도 했고 모이기도 하면서 계속 공비토벌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북진을 하면서 여러 곳에서 전투를 했는데 나는 373고지전투 후 우리가 점령한 고지에 근무를 나갔다가 갑자기 적군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처음 포탄이 날아오면서 공격을 하더니 중공군이 밀고 올라 왔습니다. 나는 처음 포탄에 허리를 부상당한 후  거동을 할 수가 없어서 포로가 됐습니다. 그 당시 내가 부대 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9638부대 도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9638부대가 2사단인지 32연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유격대원들이 외지에 나가게 될 때 내가 증명서를 만들어 주던 도장이었고 9638부대 도장이 2사단 관내에서는 통과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되니까 우선 그 도장이 문제가 될 것 같아 땅에 묻었습니다. 가지고 있으면 내 신분이 밝혀지게 되겠고,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고 해서 나중에 다시 찾는다는 생각으로 묻었는데 도망 올 기회도 없고 그대로 포로가 되어 중국까지 갔던 것입니다.

포로는 됐지만 나는 부상 포로니까 후송이 됐는데 같이 후송되는 중공군 통역 장교가 다리가 잘렸는데 내가 그 사람 시중도 들어 줬지만 그 통역 장교가 나를 잘 봐줬습니다.
내 이름을 자기가 데리고 있다가 죽은 중공군의 이름으로 바꿔 준 것입니다.

전사한 중공군의 이름이 표광인데  나를 대신 표광으로 바꿔 준 것입니다. 그 통역관 얘기는 내가 표광이라는 중공군 이름으로 후송을 갔다가 상처가 치료되면 다시 이승만이(남한) 한 테로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중공군이 환자를 수송하는데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만 갑디다. 꽤 오래 걸려서 길림성까지 갔는데 진짜 표광의 어머니가 면회를 왔어요. 표광의 어머니가 나를 보니까 이름은 표광 인데 자기 아들은 아니거든요.

탄로가 났지요. 그렇게 되니까 통역관 장교도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포로가 돼서 길림성까지 가는 기간이 있고 또 길림성에서 두 달 정도 있었으니까 꽤 오래 되었는데도 내 상처에는 계속 고름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놈이 나를 인솔 하더니 이북의 남포 내무서로 넘겨주었습니다.

길림이라는 곳이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시내가 있는데 기차역도 크고 상당히 큰 도시더군요. 우리는 거기서 밖에도 맘대로 나다녔는데 길림에서는 더 이상 못 들어가게 해요. 왜 그러냐고 물어 보니까 중국에서는 남한을 점령했다고 했는데 부상자들이 중국 본토에 많이 흩어져 들어가면 반란이 일어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압록강을 건너오는데 보니까 다리가 끊어진 것을 나무를 엮어서 다시 놓았더군요.

남포 내무서에서 감방에 며칠 있다가 문초를 받았는데 이름은 그대로 김익수라고 했고 노무자 인데 포탄을 날라주다가 포로가 됐다고 하니까 너는 이마에 철모자국이 있는걸 보면 틀림없이 국방군이라는 겁니다.
이북 놈들한테는 항상 외곬으로 얘기를 해야지 왔다 갔다 하면 죽는 겁니다.
나는 6.25 전 정보활동을 할 때부터 빨갱이들을 많이 상대해 봐서 그놈들 속을 잘 알거든요.
나는 피난 다니다가 노무자로 잡혀 와서 포탄 나른 죄밖에 없다고 하니까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철조망 밖으로 세우는데 발밑이 낭떠러지고 그 아래는 강입니다. 문초를 하던 놈이 미제 권총을 꺼내더니 나보고 마지막 소원이 뭔지 말하라기에 똑같이 나는 노무자였고 마지막으로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했더니 땅! 하고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내가 그대로 서 있는 거예요. 내가 그대로 서 있으니까 그놈은 “야! 이 새끼 봐라! 간뎅이 크다.”고 하면서 다시 땅 하고 또 쏩디다. 나는 진짜로 또 쏘는 줄 알고 죽는가 보다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가만히 서 있으니까 그때서야 그놈이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면서 내 어깨를 탁 치더니 배짱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나보고 인민군 하라는 겁니다. 인민군에 가면 소대장은 할 수 있으니까 인민군 하라고 꼬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글씨도 쓸 줄 모르고 아는 것도 없어서 그런 거 못 한다고 했지요.

거기서 다시 인민군에 넘겨져서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개성 판문점을 거쳐서 3번째 포로 교환 때 넘어 왔습니다.
포로 교환이 돼서도 거제도로 갔다가 밀양으로 해서 석방이 됐습니다. 포로 때는 인민군들보다도 더 겁나는 것이 같은 포로들 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만약에 나도 아는 사람을 만났으면 6.25 전에 일이나 6사단 때와 유격대 때 일을 일러바치게 되면 곧바로 죽는 거지요.
같은 포로들끼리도 서로 일러바치게 되면 처음에는 밥도 잘 먹고 편하게 해 주지만 나중에는 일러바친 놈도 같이 죽이는 건데 그걸 모르니까 서로 일러바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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