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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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이 지 용 (350401-xxxxxxx)
· 작성자 독수리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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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이    지     용  (350401-xxxxxxx)
주   소 : 서울 동작구 사당4동 138-7
직   위 : 독수리유격대 본부 대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 회원


독수리유격대 참전 경위

우리는 낭유리(3.8이북)에 살다가 몰수를 당하고 6.25때 일동면 길명리로 피난을 나왔습니다. 보병 제 17연대 1대대가 일동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나는 일동 헌병 파견대에서 쑈리(심부름하는 소년)로 일하고 있다가 최종성씨를 만나서 독수리유격대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내가 심부름하고 있는 헌병대에 최종성씨가 유격대 간부 몇 명을 데리고 왔는데 최종성씨가 나를 보더니 “어떻게 여기(헌병대)에 왔느냐? 가족들은 어떻게 됐느냐? 동네 누구누구는 어떻게 됐느냐?”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물어 보길래 우리집 사정에서 부터 동네사정까지 내가 아는 대로 다 말씀을 드렸더니 “유격대를 조직해서 고향에 들어가 치안도 하고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하면서 따라 나서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너는 여기 헌병대에 일을 하였으니 네 맘대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하셔요. 그래도 같이 가게 해 달라고 매달렸죠. 어떻게 해서였는지 나를 헌병대에서 데리고 나오셔서는 조치미 지서로 왔습니다. 조치미 지서에서 포천 내촌등으로 전화를 하니까 여러 사람들이 조치미로 왔습니다.

이동에서는 이강헌씨 이봉학씨등이 임시 치안대를 하다가 왔는데 이동쪽에서 온 사람들은 총으로 무장을 했는데 포천쪽에서 온 사람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유격대는 정탐(수색)활동과 빨갱이 소탕하는 일을 하다가 얼마 후 1대대와 합류를 하게 됩니다.

유격대에 참여한 사람들은 6.25전부터 노동당에 반대하던 사람들과 공산당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유격대원은 전부가 반공사상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와 최면수 등 어린 나이의 사람들도 많았는데 최면수 대원의 형 최면복씨는 6.25이전에 월남해서 육군 정보대 포천 파견대(6.25전 조치미 소재)에서 첩보 활동을 하다가 공산당에게 희생됐습니다. 모두들 이러 저러한 연유를 가지고 반공 활동에 뛰어 들었던 것입니다.

경험과 연륜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학식이 많은 계층도 아니었으니까 체계적으로 반공 사상이나 애국관은 내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에 반대하고 전쟁에 나서서 싸우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자세는 확고했습니다. 그런 정신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17연대에서 억울하게 쫓겨나서도 흩어지지 않은 채 다시 유격대를 조직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보병 제 17연대 1대대와의 상황

유격대가 조직되어 처음에는 일동 정미소 부근에 주막집이 있었는데 그 옆에 민가를 사무실로 쓰고 사방에 련락을 취했습니다. 유격대 사무실 바로 옆에는 17연대 1대대 의무대가 있었습니다. 1대대 하고는 따로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1대대측에서는 현역병이 우리 사무실에 연락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서로 협조를 하다가 1950년 11월 13일(11월 18일인 것 같기도 함)에 1대대하고 합류를 해서 일동면 화대리(양조장 자리)에 옮겨갔습니다.

12월 28일에서 29일경에 이동면 도평리 여우 고개에 중공군이 진출했다는 정찰 정보가 있었고 1대대 본부에 보고 헸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에 1대대 본부는 운담 삼거리(화대리)에 주둔했고 연대 본부는 가평군 현리에 있었습니다.

12월 31일 저녘에(10시경) 중공군이 수입리에서 곰뱀이로 해서 일동 중학교쪽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후퇴를 해서 일동고개(싸리고개)를 넘으려고 하니까 아직 후퇴 명령이 없다고 통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화대리 안동내로 해서 청계골짜기를 지나 일동 지서자리(1대대에 합류하기전에 유격대가 주둔했던 곳)에 와서 배치를 하고 경계 근무를 하는데 일동고개의 포병 진지가 함락됐다고 하면서 헌병들이 후퇴를 알렸습니다. 그때가 밤 12시쯤 되었습니다.

1대대 본부와 우리는 먼저 후퇴를 했고 정찰을 나갔던 대원들은 뒤따라와서 현리를 가니까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합류를 해 가지고 피난민과 섞여서 양수리 강을 건어 충주 집결 지시를 받았습니다.
중공군은 현리에서 가평쪽으로 진입을 했고 우리 유격대는 충주까지 후퇴를 했는데 우리가 주둔했던 곳이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 입니다. 과수원 자리에 유격대 사무실을 두고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부터 유격대장의 연락병을 했습니다.

거기서 영월 지역에 적군이 진입 했다는 정보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낮에는 비행장 경비와 수색정찰을 했으며 밤에는 잠복근무를 나갔습니다.
평상시에는 우리 대원의 1/3정도만 근무를 나갔는데 32연대로 가던 날 저녘에는 어찌해서 인지는 모르나 유격대원 거의 전부가 근무를 나갔고 막사(민가)에는 취사병과 약간의 대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암호가 “책상 연필”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저녁 식사 후에 근무를 나갔는데 그날 저녁에는 언제 나갔는지 왜 그렇게  많이 나갔는지 모릅니다. 밤 중(새벽 1시쯤으로 추정)에 밖이 웅성웅성 하고 이상스러워 나가 보니까 대원들이 차에 타고 있었고 자대에 남아 있던 대원들이 차에 타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기습 상황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대장에게 사실을 보고했더니 최종성 대장이 나오셔서 “무슨 일이냐? 어디로 출동하는 것이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차가 떠나 길래 내가 먼저 차에 타고 최종성 대장은 어떻게 된 것인가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이 차가 출발하자 뛰어와 차에 매달렸으며 뒤에 탔던 사람들이 대장의 손을 잡아 당겨 주었습니다.
차는 계속 가다가 어느 검문소에서 오랫동안 지체를 했고 32연대에는 이른 새벽녘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17연대 1대대에서는 내가 대장 당번을 했고 이기재씨가 유격대 서무계를 보았으며 유격대에서는 대원이 직접 대대 본부에 들어가서 연락을 취했습니다.(일동에서는 한상준이가 연락을 했으나 충주에 내려가서는 다른 사람이 했던 것으로 기억됨)
우리 유격대는 대대 본부와 따로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화는 가설되지 않았습니다.

32연대에 도착해서는 아침에 김영필 대대장을 보았으며 몇 일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쉬다가 몇몇은 다른 곳으로 파견도 나간 것 같습니다.
얼마를 있다가 부대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 역전에 집결을 하였는데 열차를 대기하고 있는 중에 17연대에서 우리를 데리러 왔으니 17연대로 가야 한다는 얘기들이 들렸습니다.

헌병이 2명인가 보였고 정복한 군인, 김영필 대대장 유격대 간부들이 먼 곳에서 얘기하는 것이 보였는데 대화의 내용은 우리 대원들이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의 행동이나 모습으로 보아 유격대 간부들이나 헌병들은 김영필 대대장에게 따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고 김영필 대대장은 헌병과 유격대 간부들에게 무엇인가 설명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 이였습니다.

17연대에는 저녁 무렵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대원들은 창고에 가두고 대장과 간부들은 대대 본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대원들에게는 무엇이 잘못 되었다거나 왜 32연대로 갔느냐는 질문도 없었고 아무런 조사도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은 못 얻어먹고 창고에서 눕지도 못한 채 쪼그리고 앉아서 지샜습니다. 밖에는 못 나가게  현역들이 지킨 것 같습니다.

아침에 떡국을 줘서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이 음력으로 설날이었으니까요.
떡국을 먹고 나서 9-10시쯤 되었을 때 간부 5명을 현역들이 집총하여 호위하고 우리가 갇혀 있는 창고 앞으로 와서 얘기를 했는데 우리가 도망죄에 해당한다거나 죽는다는 얘기는 비추지도 않고 현역들도 그런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말이 없고 최종성 대장이 주로 말을 했는데 문 앞에서 말을 했기 때문에 뒤편에 앉은 사람은 못 알아들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때의 대장 목소리는 목이 잠기는 낮은 목소리였고 얘기의 주된 내용은 “우리는 이제부터 자네들과 같이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반공을 위해서 뭉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섰으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흩어지지 말고 한데 뭉쳐서 끝까지 싸우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성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길 바란다.”는 내용을 얘기하고 당부를 하는 중에 현역들이 옆에서 짧게 얘기하라고 제지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일 나중에 대장과 간부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는데 우리 대원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듣다가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무엇인가 크게 잘못 됐다는 섬뜩한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32연대로 갈 때나 17연대로 올 때도 그저 소속이 바뀌나 보다 했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우리를 인솔했던 헌병들도 그런 기색은 일체 없었습니다.
대장과 간부들이 만세를 부르고 나자 집총한 현역들이 간부 다섯 명을 인도해 갔으며 우리는 그대로 창고 속에서 있다가 총소리를 들었고 얼마 후 군인들이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발자국 소리를 집총 했던 군인들이 총살 집행 후 돌아가는 소리로 추측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긴장하기 시작했고 대장님과 간부들이 총살당한 것으로 단정을 하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우리도 같이 죽어야 한다!”는 등 당황하고 있던 중에 현역들이 다시 와서 우리 대원을 밖으로 집합시켰습니다.

2과(정보과)앞에 집합을 시키고 정보장교(보좌관)가 툇돌 위에 올라서서 “너희들은 군법 제9조에 의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간부들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일단 살려준다. 우리 부대에는 너희들처럼 부정한 사람은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에서 지급한 군복을 일체 벗어라!”하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유창훈 1대대장도 있었고 1대대 간부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지시는 정보장교가 했습니다.
분위기는 아주 살벌했습니다.

군복을 빼앗긴 유격대원들은 무장된 현역들에게 인솔돼서 강변(우리는 그 강을 달래강으로 불렀음)으로 갔고 강을 건너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강 건너는 적진이기 때문에 우리가 건너가기를 망설이자 무장한 현역병들이 건너가라고 강요를 하여 적진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건너간 강은 마침 얼어붙은 곳이 있어서 얼음 위로 걸어서 건넜습니다. 그날이 음력설날이니까 무척 추웠습니다. 옷을 모두 뺏기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얼음 위를 건넜는데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고 적 지역이기도 하니까 바람막이가 되는 곳에 모여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을 했습니다.

소대장을 하던 민영태씨와 김익수씨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강력하게 주장하더군요.
김익수씨 주장은 “우리가 아무런 신분증도 없으니 여기서 각자 흩어져 개인행동을 하면 공비에게 잡혀 죽거나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대장님도 돌아가시면서 흩어지지 말고 단결해서 끝까지 싸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단체행동을 하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김영필에게 책임이 있다.
김영필이를 찾아가면 그 사람도 우리를 지원해 주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원들이 모두 찬성을 하고 32연대로 갔습니다.

우선 옷을 뺏겼으니 비어 있는 민가에 들어가 신발과 옷을 주워 입고 추위를 모면했습니다.
우리가 건너간 강 언덕에는 민가가 있었는데 나이 많은 노인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러 이러한 사정이라고 말하며 옷을 얻어 입었지만 우리의 얘기를 믿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되는대로 짚새기(짚신)고 고무신이고 주워 신었으니 꼴(차림새)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17연대로 돌아올 때 32연대가 제천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으니 제천 T. M. O.에 가서 32연대 3대대 위치를 확인할 생각 이였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17연대 1대대가 북쪽은 적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적진으로 쫓겨났으니까 제천 쪽으로 한참을 내려오다가 적지를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남쪽으로 강을 건너왔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장정들이 떼를 지어 다니니까 민간인들이 봐도 수상하다고 신고를 하고 현역들에게 발견이 돼도 조사를 받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17연대 1대대로 신분 확인이 갑니다.
그러면 1대대에서는 자기들이 쫓아 버리고도 도망병이라고 하며 혼을 내 주라는 겁니다. 그래서 17연대 파운다리를 벗어나려고 쉬지도 않고 걸었던 생각이 납니다.

1대대하고 합류해서는 우리 유격대가 크게 전투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이동에서 후퇴하기 전에 최영찬 대원이 낭유리에서 최초로 전사를 했고 충주로 내려와서는 의성인가 월봉산에 공비 토벌을 하러 나갔다가 얼마간의 전투를 했습니다. 월봉산에 나와 있던 전투 경찰의 대장이 김주원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최종성 대장과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나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왜정때 이동면 면직원을 하면서 보국대를 담당하던 사람이었고 친일적인 사람이었는데 월봉산에서는 전투경찰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종성 유격대장과 김주원 전투경찰대장은 상당히 반가워하고 서로 격려해 주던 생각이 납니다.

32연대 3대대 및 수색 중대 배속 당시

우리 유격대가 32연대로 가서는 의성 청송 의흥 신령 일대에서 공비 토벌을 했습니다.
전선은 북쪽에 있었지만 공비 등이 일월산에서 팔공산까지 상당한 세력으로 밀고 내려왔기 때문에 항공 지원(호주기)까지 받으며 상당한 기간을 상당한 규모로 토벌작전{육군 해병 미군 공군 합동 작전)을 했습니다.
공비토벌이 끝나고는 안동에 집결해서 차량 편으로 양평까지 이동을 했습니다.

양평에 도착하든 날 0시를 기해서 보병 제8사단과 전후방 임무 교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동에서 양평으로 올 때는 완전군장으로 왔는데 양평에서부터는 전투무장으로 군장을 바꾸어 주더군요.
진격을 하면서 가평군 설악면 운악산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했습니다. 양평에 도착하면서부터는 우리가 3대대 소속에서 연대 수색중대로 배속이 변경 되였습니다.

그러니까 운악산 전투부터 수색대 소속으로 한 것입니다. 운악산 전투에서 밀린 중공군이 청평 수력발전소 건너편에 진지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청평 발전소를 건너기 위한 전투가 치열했습니다. 청평 발전소 도하 작전에서는 공군과 기갑부대의 지원도 받았는데 아군의 피해가 많았던 이유는 우리 아군의 일부가 강을 건너가서 절벽에 붙었는데 중공군의 저항이 심하니까 전진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공군과 탱크가 포 지원을 했기 때문에 도강해 있던 우리 아군의 피해가 심했던 것입니다.

청평 발전소 지역은 원래 6사단 소관 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2사단도 이곳 발전소를 통해서 강을 건넜거든요. 같이 강을 건너서 6사단은 화천쪽으로 빠지고 우리 32연대는 가평 현리 명지산(목동) 광학산(광덕령) 국망봉 백운동 하오고개 육단리(금화군 근남면) 사곡리 오성산(천불산) 373고지를 연결하여 금성까지 진격을 했었습니다.

내가 처음에는 최종성 대장의 연락병을 하다가 32연대의 양평에서부터는 연대 정보과 O. P.에 근무를 하면서 전투 상황을 무전 받아서 정보장교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전투를 크게 한곳이 대체로 청평 현리 광덕령 국망봉 백운동 하오고개 천불산 734고지 373고지등인데 그 중에서도 734고지 373고지 천불산 전투가 제일 어려운 전투였습니다.

373고지 전투때는 수색중대장이 부상을 당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박영식 중위(정보장교)가 유격대를 지휘한 것으로 기억 합니다. 연대장이 전투현장까지 나갔었고 박중위도 어딘가 부상을 해서 내려 왔습니다. 나는 연대 O.P.에서 강?? 일등중사와 무전기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아군과 적군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군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도 궁금해서 전투중에 전방 구호소엘 내려가 보니까 부상자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기명 안윤호대원이 후송되어 왔길래 어떠냐고 물으니까 지금 다들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끝내 373고지가 점령은 되였지만 그건 우리 유격대가 점령한 것이고 사실 전술면에서는 무모한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유격대는 자발해서 싸운 것이니까 이제 와서 이러니저러니 해서는 안 되겠지만 군 당국(지휘관)에서는 어떻게 해서 T. O.마저도 잡아 주지 않았는지 사실 섭섭하기보다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훈장을 바랬든 것은 아니지만 이름은 기록돼 있어야 전사를 했어도 기록이 남는 것 아닙니까? 다른 건 다 제쳐놓아도 전사로만은 처리를 해 주었어야지요. 그것이 지휘관의 책임이고 인간의 도리일 것입니다. 우리 생존 대원들이 정성을 모아서 전몰 대원의 추모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이라도 전몰 대원의 명예는 국가가 찾아 주어야 하고 명복을 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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