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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진회장  
(32연대 아래줄좌로부터  
박홍진회장  
연대작전참모 변중령  
작전하사관. 작전장교)  


현충일 추도식  
2001년6월6일  


고지를 점령하여 만세를 부르는  
국군용사 팔목을 처맨 병사가  
셋 목숨을 바친 병사는 또 얼마랴  
1. 청년단의 향토방위

해방 후 미소 양군이 남과 북으로 진주를 하게되며 전략적 요충지(要衝地)이기도 한 포천은 어느 곳 보다도 좌우익(남북)간에 분쟁과 대립이 심한 곳이다. 특히 연평천을 삼팔선의 경계로 삼았던 이동과 일동은 남북간에 습격 방화 약탈이 빈번하였다.
경찰과 국군은 치안과 방어력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을 청년단이나 의용소방대로 충원하여 군(軍)이나 경찰(警察)과 연계하며 향토방위와 치안을 유지하였다. 독수리유격대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청년단과 의용 소방대 등에서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2. 서북청년단과 대북 정보원

청년들의 향토방위와 치안활동은 일반적인 것이었고, 공산 체제에서 핍박(逼迫)을 받은 사람이나 반공주의자들이 남쪽으로 월남을 하여 적극적인 대공투쟁을 하려고 조직한 것이 서북청년단이다.
광복 후 국가와 사회의 참여를 위하여 많은 청년단체가 결성되었지만 반공의 기치를 내세웠던 서북청년단의 활동은 대단한 것이었고, 국군이나 경찰은 대공작전이나 정보수집에 이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독수리유격대의 간부진 대부분이 대북 정보원이나 서북청년단 출신이다.

3. 6.25 발발과 서북청년단

최종성을 비롯한 독수리유격대 간부진들은 6.25가 발발하자 15-20 여명의 대원들을 모아 후퇴(동두천 방향)를 하였고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경찰(전투경찰)과 연합하면서 대공투쟁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이러한 사실은 독수리유격대를 조직한 최종성대장의 행적을 잘 아는 당시의 군인 경찰 주민들의 증언과 국방부 당국의 조사결과에 의함)

월남한 반공청년들이 적극적인 對共鬪爭을 위하여 조직한 것이 西北靑年團이었고 당시 이들의 대공활동과 투쟁은 대단한 것이었다.
반면에 국군이나 경찰에서는 서북청년단에서도 별도로 정예요원을 차출하여 무장시키고 3.8선을 넘어가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최종성(창설 독수리유격대장)과 김익수(2대 독수리유격대장)는 7사단 9연대와 포천경찰서의 특명을 받고 정보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최종성은 이북으로부터 현상금까지 걸렸던 인물이며 최종성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포천경찰서에서는 신분증을 5가지나 만들어 수시로 바꾸게 하였으며, 최종성이 삼팔선을 넘으면 서장이나 간부들이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며 지원대를 일동이나 사직리에 대기시키기도 했고, 그는 내무서를 뒤져 비밀문서를 가져오거나 불을 지르고 민주인사들을 동반하여 월남시키기도 하였다.
포천 경찰서에서는 경찰서장과 경무과장 그리고 최종성의 사택에만 전화를 놓을 정도로 최종성의 정보활동에 비중을 두었었다고 당시 포천경찰서 장비계를 담당했던 경찰관 이학기씨(포천 경우회장)는 증언한다.

6.25가 발발하자 최종성과 최종철은 서북청년단원 20여명을 데리고 경찰과 함께 동두천 방향으로 이동을 하였으며(7사단 9연대 양문 파견대장 특무상사 양상현 증언) 충청도지방까지 후퇴하였다가 9.28 서울이 수복되자 포천에 돌아와 대원을 70여명으로 증원하여 독수리유격대를 창설하였다.

4. 독수리유격대의 참전 경과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이 수복되자 포천에 돌아온 최종성 최종철 최종석형제들과 이강헌등이 무장유격대 창설을 주선했고, 이동 일동 내촌 포천의 경찰지서나 소방서 청년단 소속원으로 일하던 청년들이 모여 1950년 10월경 이동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토벌작전을 폈다.

자체적으로 향토방위에 주안을 하던 무장유격대는 규모를 확장하고 국방부로부터 정식으로 작전지침을 받을 수 있는 호출부호를 받기 위하여 일동에서 포천 국민학교로 본부를 옮기고 “독수리유격대”라는 부대 명칭을 사용하면서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교관(대위)으로부터 戰術과 제식훈련을 하였다.

교육훈련을 받은 독수리유격대는 국방부로부터 검열을 받아 정식 호출부호를 받기로 약정된 상태에서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고 아군의 기세가 불리해지자 파견되었던 교관은 본대로 철수를 하고 독수리유격대는 다시 일동으로 옮겨 수색정찰과 공비토벌에 임하게 되었다.

아군의 전세는 더울 불리해지고 17연대 1대대가 후퇴하여 일동에 주둔하자 독수리유격대는 1대대와 합류하여 충북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에 주둔을 한다(1.4후퇴)

이후의 독수리유격대 참전지역은 다음과 같다.

후퇴 ▶ 일동면 화대리 ▶ 청계 ▶ 봉수리 ▶ 강구남 ▶ 현리 ▶ 양수리 ▶ 양평 ▶ 충북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주둔) ▶ 부대 재정비, 경계 수색정찰 ▶ 32연대 3대대로 이동 ▶ 취약지 파견근무 ▶ 17연대 1대대 복귀(최종성 대장등 간부 5명 총살 대원 58명 敵陣(중공군 점령지구)으로 추방- 김익수 대장 추대 후 독수리유격대 재편성)

32연대 3대대배속(태백산 지구 공비토벌 義城, 靑松, 義興, 神靈, 丹陽, 靑松, 安東, 豊基) ▶ 양평(32연대 수색중대 배속) ▶ 북진(청평, 운악산, 하판里, 상판里, 샛말, 화야山, 加平, 懸里, 명지山(목동), 淸溪山, 姜氏峰, 國望峰, 白雲洞, 廣德山, 하오고개(복주山), 도성고개, 도덕洞 육단里, 사곡里, 천불山, 373高地, 734高地, 金城지구 전투,(16명 戰死, 1명 捕虜, 다수대원 戰傷) ▶ 독수리유격대 해체(국방부 훈령 휴전을 앞두고 비군인 참전부대 해체) ▶ 일부 대원은 귀향 일부대원은 현지입대 현역복무 ▶ 휴전(귀향 대원은 휴전 후에 재 입대 군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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